Your brain is hard wired to pay attention to about 150people. Try to have a relationship with any more than that, and yourlife will turn to pure crap. Just ask the Military, Gore-Tex, or Krippendorf's tribe. They'll all tell you the same thing. One fifty isthe way to go. They've known for hundreds of years that people workbest in groups of 150 or less. Now it's your turn.The human cortex, responsible for complex thought and reasoning, is overgrown in humans when compared to other mammals. Scientists have argued for years about why this is the case.
One theory holds that our brains evolved because our primate ancestors began to gather food in more complex ways. They began eating fruit instead of grasses and leaves. This involved traveling long distances to find food, and required each species to maintain a complex mental map in order to keep track of fruit trees. More brainpower might have been needed to determine if a fruit was ripe, or to discern proper methods for peeling fruit or cracking nuts.
The problem with this theory is that if one tries to match brain size with the eating habits of primates, it doesn't work. Some small-brained monkeys are eating fruit and maintaining complex maps and some larger brained primates are eating leaves.
What does work, apparently, is group size. If one examines any species of primate, the larger their neocortex, the larger the average size of the group they live with.
Anthropologist Robin Dunbar has done some of the most interesting research in this area. Dunbar's argument is that as brains evolve, they become larger in order to handle the unique complexities of larger social groups. Humans socialize the largest social groups because we have the largest cortex. Dunbar has developed an equation, which works for most primates, in which he plugs in what he calls the neocortex ratio of a particular species - the size of the neocortex relative to the size of the brain - and the equation gives us the maximum expected group size for each species. For humans, the max group size is 147.8, or about 150. This figure seems to represent the maximum amount of people that we can have a real social relationship with - knowing who another human is and how they relate to us.
Dunbar has gone through anthropological literature and found that the number 150 pops up over and over again. For example, he looked at 21 different hunger-gatherer societies around the world and found that the average number of people in each village was 148.4.
The same pattern holds true for military organization. Over the years, through trial and error, military planners have arrived at a rule of thumb for the size of a functional fighting unit - 200 men. They have realized that it is quite difficult to make any larger a group than this to function as a unit without complicated hierarchies and rules and regulations and formal measures to insure loyalty and unity within the group. With a group of 150 or so, formalities are not necessary. Behavior can be controlled on the basis of personal loyalties and direct man-to-man contacts. With larger groups, this seems impossible.
Further is the religious group known as the Hutterites, who for hundreds of years, through trial and error, have realized that the maximum size for a colony should be, low and behold, 150 people. They've been following this rule for centuries. Every time a colony approaches this number, the colony is divided into two separate colonies. They have found that once a group becomes larger than that, "people become strangers to one another." At 150, the Hutterites believe, something happens that somehow changes the community seemingly overnight. At 150 the colony with spontaneously begin dividing into smaller "clans." When this happens a new colony is formed.
Another good example of our hard wired social limits is Gore Associates, a privately held multimillion-dollar company responsible for creating Gore-Tex fabric and all sorts of other high tech computer cables, filter bags, semiconductors, pharmaceutical, and medical products. What is most unique about this company is that each company plant is no larger than 150. When constructing a plant, they put 150 spaces in the parking lot, and when people start parking on the grass, they know it's time for another plant. Each plant works as a group. There are no bosses. No titles. Salaries are determined collectively. No organization charts, no budgets, no elaborate strategic plans. Wilbert Gore - the late founder of the company, found through trial and error that 150 employees per plant was most ideal. "We found again and again that things get clumsy at a hundred and fifty," he told an interviewer some years ago.
Take a lesson from this. If you are engaged in a large enterprise or are planning to work for one, realize that large groups rapidly reduce the efficiency of an operation. If each department is separated, especially if there are hundreds or thousands of people involved, complex systems of organizations will be required to keep everyone in check. Peer pressure is much more powerful than the somehow vague concept of a boss or punishment. People will work only hard enough not to get fired in a very large group, but will live up to the expectations of their peers in smaller groups where they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each of their co-workers. Of course, a small group size is not by any means a guarantee of success. Small enterprises fail all the time. It's just a concept -- an idea to keep in the back of your mind as you vegetate in that basement cubicle.
Paul Robert Magocsi, Editor, "Encyclopedia of Canada's Peoples"
박 의범 교수 옮김 (강원대학교)
어원
허터라이트는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해왔지만, 16세기 유럽지역에 산재해 있던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그들의선조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출현한 세 부류의 주요한 개혁운동은 루터교(Lutheran),칼빈개신교(Reformed), 그리고 재세례파(Anbaptist)이었다. 허터라이트는 메노나이트(Mennonites) 및애미쉬(Amish)와 함께 재세례파에서 유래하였다.
아나벱티스트 혹은 재세례자(rebaptizer)라는 용어는 주요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캘빈, 쯔윙글리 등이 위력이 없다고 생각한 광범위한 급진적 종교집단들에게 붙여진 경멸하는 용어였다.재세례파들은 교회와 국가가 엄격히 분리되기를 원하여 개인이 보다 책임지는 결정에 근거한 성인세례를 주장했으며, 신약성경에기초하여 병역복무를 거부하였다. 성인들은 1525년도에 스위스 쥬리히에서 처음으로 재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캐톨릭 국가에서는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성인세례는 그들이 과거에 받은 세례가 무효임을 암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재세례를 통해국가로부터의 분리와 정치활동이나 군대복무를 거절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재세례파의 후손들은네델란드와 북유럽에서 이주해온 메노나이트, 스위스와 중앙유럽으로부터 옮겨와 그후 애미쉬가 된 스위스 브레드런(SwissBrethren),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동유럽 햅스버그 지역으로부터 온 허터라이트를 포함하고 있다. 허터라이트가 출현한지역은 오늘날 서부 오스트리아와 북부 이태리지역인 타이롤(Tyrol)의 햅스버그 지방이었다. 중앙 유럽의 다른 지역 재세례파들과마찬가지로 타이롤 지역 재세례파들은 오스트리아 햅스버그 통치권자였던 찰스 5세에 의해 무자비한 핍박을 받았다. 그는 성(聖)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로마 캐토릭교회를 이교도로부터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곱 허터(Jacob Hutter)라는 타이롤 출신의 재세례교인이 1529년에 자신의 신봉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현재의 체코공화국인 모라비아(Moravia)의 햅스버그
지방까지 북동쪽으로 옮겨갔다. 허터의 신봉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군복무의 거절을 요구하는 성인세례를 베푸는 것 이외에 재산을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이것은 교인들이 "부르더호프 공동체"(Bruderhof: Colonies)라고 부르는 자급자족의경제공동체에서 함께 단결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외부인에게는 유별나게 보였고 지역 당국으로부터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외부로부터의 이러한 공격들은 공동체 내의 단결과 결심을 오히려 증대시켰다. 후터는 그의 신봉자들이 타이롤을 떠나서 모라비아로가도록 납득시킨 후에 자신은 수년 뒤인 1536년에 처형되었다. 이 공동체는 그 이후부터 허터라이트(Hutterites)로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16세기초 수십 년 동안 모라비아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온 난민들에게 약속과 희망의땅이 되었다. 그 지역의 귀족들은 로마 캐토릭이었지만, 이들은 햅스버그 제국의 정책에 반대하였으며 재세례교인을 포함해 중앙유럽의 종교전쟁 난민들을 환영하였다. 현지 귀족의 보호로 인해 16세기 후반에는 모라비아 허터라이트는 몇몇 역사가들이 명명한것처럼 '황금시대(Golden Years)'를 맞게 되었다. 약 50개 내지 60개의 허터라이트 공동체들은 전체 구성원이 약2만 명에서 3만 명에 달하는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난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라비아로 피신을 계속하였으며,허터라이트는 귀족들과 현지인에게 필요한 교육 및 의료 전문가로서 뿐만 아니라 세라믹산업과 공예품 생산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킬 수있었다.
1593년에 햅스버그 제국과 남부지역으로 급속하게 침략해 들어오는 이스람 오토만 제국간에 13년 동안새로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에 햅스버그 군대가 다수의 허터라이트 공동체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토만 군대가 남부 모라비아에공략함으로써 어떤 공동체들은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살해되고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1606년 오토만 제국이 패배한 후오래지 않아서 1618년에 신구교도간 30년 종교전쟁(Thirty Year's War)이 발발하였다. 이것은 캐토릭에 대한개혁운동(Catholic Counter-Reformation)이 최고조에 달하게 만들었으며, 햅스버그 황제는 귀족들에게모라비아로부터 허터라이트를 추방하도록 명령하였다.
1622년 추방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허터라이트 주민 3분의1이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주민들 중에는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고 소위 해버너(Habaner)라고 불리우는로마 캐토릭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모라비아로부터의 추방으로 인해 허터라이트들은 동부 트라실바니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나라는 햅스버그의 지배에 반대하는 개신교 항가리 왕자들이 지배하던 반독립국가였다. 모라비아 난민들은 오스트리아 캐린티아 지방에서온 난민들과 트라실바니아에서 합류하였다. 허터라이트 공동체는 트라실바니아에서 살아남았지만 1690년 이후부터 공동체생활을포기하였다. 허터라이트들은 그 다음에 이주한 현재 남부 루마니아지역인 왈라치아에서 공동체생활을 재개하였다.
그후허터라이트들은 북동부 러시아제국으로 이동하여 현재 북중앙 우크라이나지방인 라디체부에 정착하였다. 그들이 라디체부 지역에서 보낸70년간(1770-1842)은 매우 힘든 시기로서 다시 공동체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 우크라이나 모로취나 지역으로옮겨간 허터라이트들은 메노나이트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다시 자신들의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허터라이트들은호구지책으로 농업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들은 1874년까지 30년간 모로취나 지역에 머물렀다. 그들이 떠나게 된 것은러시아제국 정부가 제정한 새로운 개혁정책이 주요 동기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에 허터라이트나 메노나이트 교도들이 모두 독일어를사용하고 있었지만 초등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육의 실시와 1871년부터 남자 시민 모두에게 군복무를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
허터라이트들이 모라비아로부터 축출된 1622년부터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옮겨온 1874년까지 250년간의 방랑기간은 매우 어려운시기로서 한 때는 그들의 공동체가족이 불과 43명밖에 안될 때도 있었다. 그들은 여섯 차례나 근절대상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피난하였으며, 두 번이나 그들의 기본적인 신앙원리인 공동체생활을 포기하였다. 신세계인 미국으로 출발하는 저녁에 허터라이트공동체의 인원은 1,200명을 넘었지만 두 개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그들이 거주하던 우크라이나 모로취나 지역의 한 마을인후터도르프의 끝자락에 다리우스 월터가 다리우스로이트(Dariusleut)이라는 공동체를 재설립했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공동체생활에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였던 대장쟁이 마이클 왈드너의 이름을 따라서 쉬마이데로이트로 알려져있었다. 따라서 1874년 북미지역으로 떠나기 이전부터 복수공동체가 허터라이트에 이미 나타났었다.
이민과 도착
일반적으로 수년간에 걸쳐 타국으로 이주한 다른 집단과는 달리 허터라이트들은 단기간에 한 목적지로 출발하였다. 1874년과1879년 사이에 공동체와 공동체 이외의 총 1,265명의 허터라이트들이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 러시아제국에서 미국 사우스다코타로 떠났다. 약 절반은 세 개의 브루더호프라는 공동체를 세웠으며, 다른 허터라이트들은 비공동체의 형태로 남아 자작농장에종사하도록 결정하였다. 마이클 왈드너의 집단은 미조리 강을 따라 본 호메 카운티에 정착하여 북미지역쉬미드로이트(Schmiedeleut) 공동체의 모체를 형성하였다(Leut는 사람을 뜻함; 집단들은 보통 그들의 지도자로부터그들의 이름을 따왔음). 다리우스 월터의 지도력 아래에 있던 다리우스로이트는 겨울을 실버 레이크에서 보낸 후 1875년 울프크릭(Wolf Creek)이라고 불리는 첫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1877년에 도착한 세 번째 집단도 사우스 다코다 올드엘름스프링에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성공한 교사였던 제이콥 윕프가 이 집단을 이끌었으며 그 이후로 이 공동체는레흐러로이트(Lehrerleut) 즉 가르치는 사람들로 알려져 왔다. 1870년대 말까지 모든 허터라이트들은 지금처럼 사우스다코다에 거주했다. 통상 프래이리로이트(Prairieleut)로 불려지는 비공동체 허터라이트들은 대부분 메노나이트에 합류하게되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1917년까지 총 2천 여명이 사우스 다코다에 17개 공동체와 몬타나에2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인 허터라이트들은 또 다시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의무병역제도는 젊은허터라이트들이 소집대상이 되었을 때 양심적인 징집반대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징집을 거절하면 유죄선고를 받았고 공동체 학교에서독일어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전쟁을 위해 모집한 자유공채를 구입하도록 강요하였고 그들의 가축을 몰수당하는 고통을 받았다. 그결과 일년만에 본 홈(Bon Homme)을 제외한 모든 공동체가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캐나다 마니토바에 6개의쉬미드로이트, 알버타에 5개의 다리우스로이트와 4개의 레흐러로이트 등 15개의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이들이 철수한 미국내 공동체 마을들은 20년 이상 빈자리로 남아있게 되었다. 전쟁 후, 특히 1930년대의 경제대공황 기간에 소수의 공동체가사우스 다코다로 다시 옮겨 가기도 하였다.
현재 모든 허터라이트들은 북미 평원에 거주하고 있다. 1870년대 이후로 그들은한 개의 주에 3개 공동체, 500명 미만 구성원에서 3개 지역과 5개 주에 분포된 총 368개 공동체 3만5천명으로성장하였다. 쉬미드로이트는 한 개를 제외하고 모든 공동체가 1918년에 마니토바로 이주해 왔으나 그후 많은 구성원들이 미국으로되돌아가서 현재는 캐나다 마니토바 이외에 미국의 노우스 및 사우스 다코다, 미네소타 등 3개 주에 분포되어 있다.다리우스로이트와 레흐러로이트는 1918년에 모두 미국을 떠났다. 오늘날 알버타에 가장 많은 공동체가 분포되어 있으며, 사스캬춘과몬타나 및 워싱톤 주로 확대되고 있다.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알버타(130개)와 마니토바(85개)에 가장 대규모로거주하면서, 이 지역 시골주민들을 구성하고 있다. 1942년 초에 알버타는 적성국가 외국인, 허터라이트 그리고무정부·무교회주의적 기독교도(Doukhobor)에게 토지의 양도를 금지하는 토지판매금지법(Land SalesProhibition Act)을 제정하여 공동체들간의 상호거리, 각 공동체가 획득할 수 있는 토지규모 등을 제한하였다. 그이후로 이 법은 차별적이라는 법정판결을 받아 제소되었다. 과거의 정착 형태로 보아서 앞으로 사스캬춘, 노우스 다코다, 그리고미네소타 등으로 더욱 확장 될 것이 예상된다.
이들 세 가지 공동체(Leuts)간에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교제가 거의 없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 1988년 현재 146개 공동체 약 16,000명이쉬미드로이트였고, 126개 공동체 약 11,000명은 다리우스로이트, 그리고 96개 공동체 8,500명은 레흐러로이트로나타났다. 허터라이트 공동체 중 3분의 2는 캐나다에 그리고 3분의 1은 미국에 위치하고 있다. 캐나다 내에 세 가지 공동체가모두 높게 나타난다. 쉬미드로이트가 캐나다 마니토바에 85개, 미국 특히 사우스 다코다를 중심으로 61개가 위치하여 양국간에가장 공평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리우스로이트는 캐나다의 알버타를 중심으로 108개가 위치하고, 다만 미국의 18개는 대부분몬타나에 분포되어 있다. 가장 작은 집단인 레흐러로이트는 캐나다 알버타와 사스캬춘에 각각 46개와 23개, 미국 몬타나에27개가 분포되어 있다.
신앙과 공동체 생활
종교사회학의 개척자인 언스트 트로엘취(Ernst Troeltsch)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캐토릭, 루터란, 칼빈파 집단처럼 제도적인 교회와는 다른 신교도의 한 종파로서 다양한 재세례파 집단을 구분하고 있다. 그들은예수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에 기초한 훈련된 삶에 헌신된 "모인 교회(gathered church)"로서 세상과 분리된다.다른 학자들은 신약성경 초기의 순수성으로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쟁의 한 부분으로 재세례론자들을 보아왔다. 이러한 노력에서재세례의 다양한 분파들이 개인적인 지도자를 따라서 갈라지게 되었다.
허터라이트는 기독인들이 그들의 신앙적, 사회적, 경제적활동을 그들의 공동생활을 통해 나누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메노나이트나 애미쉬와 같은 다른 재세례운동의 구성원들과 구별된다.그들은 사도행전 2장 44-45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는 성경적인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허터라이트들은 단지 두 번의 일시적 과오를 제외하고는 거의500년간 공동체생활을 고수하여 왔다.
그들의 세계관은 솔기가 없는 옷과 같이 부서지지 않은 하나에 신앙적,사회적, 교육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하는데 필요한 믿음과 생활지침을 모두성문화한 허터라이트 헌장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허터라이트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크리스챤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믿음의 생활을 실천함으로서 구원받게 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순수한영적인 종교를 배격하고 재산을 포함한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따르도록 요구한다. 피터 월포트(PeterWalpot)는 그의 저서 "위대한 규정집(Great Article Book, 1577)"에서 공동체 생활에 대한 148개논거를 기술하였다. 물질적인 재화는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므로 공동체내 남녀 구성원들의 시간, 정력, 노동, 수입 등을 모두보상이 없이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납토록 되어있다.
초기의 허터라이트들은 신앙과 일의 결합을 성취하는데 최선을다하였다. 피터 라이드만(Peter Rideman)은 그의 저서 "레첸샤프트"(Rechenschaft, 1545)와"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 1541)에서, 월포트는 "위대한 규정집"에서 각각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질서, 인간의 육적·영적 본성, 공동체와 개인의 연합, 성의 관계, 재산문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 등을 상세하게설명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노인과 젊은이 사이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후터라이트들의 사고와 관습속에 스며있는 것이다. 한 톨의 밀알이 빵이 되면 그 동질성을 상실하는 것과 같이 개인은 부서져서 공동체와 연합해야만 한다는것이다. 무조건적인 순종과 자기포기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된다. 허터라이트에서는 유치원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자기부정,복종, 그리고 겸손을 배우도록 한다.
과거 허터라이트들은 그들의 영어학교로 건립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으며,아직도 그렇게 계속하는 공동체들이 있다. 그러나 마니토바와 다코타에 위치한 대부분의 쉬미드로이트들은 현재 분리된 교회건물을가지고 있다. 레흐러로이트와 다리우스로이트는 최근 그들의 식당에 교회기능을 위한 공간을 부설하였다. 오늘날 많은 허터라이트들은특별히 지정된 지역에서 집회를 갖지만 학교건물을 예배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거룩한 장소가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공동체가포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건물은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이 많은 방문객이 있을 때 약 2백 여명 이상 수용할 수 있을 만큼넓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검소하고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하여 잘 관리하고 있지만 교회의 뾰족탑은 없다. 다른 교회처럼 보통 긴의자가 놓여있지만, 내부에 장식이 없고 벽에 상징물도 없으며 최소한의 가구를 갖추어 두고 있다. 몇 개의 공동체에서는 연로한교우들을 위해 방석을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의 전면에는 한 개의 간단한 설교대가 붙어있는 책상이 있고 목회자, 부목회자, 공동체관리자, 독일어 교사, 공동체 위원회의 다른 회원들이 회중들을 향하여 성직계급에 따라서 앉도록 긴 의자가 양면에 놓여있다.회중들은 오른 편에 여성, 왼편에 남성, 앞쪽에 젊은이들 그리고 뒤쪽에 연장자들이 연령별로 각기 앉는다.
예배는매일 저녁 보통 한 시간 이내로 드리고, 주일에는 아침에 두 시간, 저녁에 한 시간 씩 두 번의 예배를 드린다. 보다 근대화된공동체들은 예배시간을 구성원들에게 알리는 사이렌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배는 담당한 목회자가 찬송을 부르고 그 첫 줄의 영창으로시작한다. 회중은 목회자를 따라서 제창으로 반복하며 중세의 성가를 닮은 높은 음의 예리한 창법으로 노래한다. 예배의 진행은편안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구성원들의 순서와 예배의 착석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 위계질서에 있어서 남성들의 권위와 그들의지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배는 지시와 훈련의 설교적인 내용으로 드려진다. 상징적으로 예배는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의 현실을강조한다. 예배드린 바로 뒤에 구성원들은 빵을 함께 나누며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북미의 허터라이트 공동체들은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형태는 유사하다. 전형적인 공동체는 구성원 규모가 75명에서 150명에 정도이고, 그들 중 2분의1은 성인이고 나머지는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다리우스로이트 공동체들은 초창기에 75명 이하였음). 1988년도 평균 규모는93명이었으며, 쉬미드로이트는 다소 크고(105명) 다리우스로이트(86명)와 레흐러로이트(89명)은 약간 적은 규모였다.공동체들이 약 150명에 이르면 통상적으로 다시 분리한다. 1950년대에는 이러한 분리과정이 약 15년마다 일어났다. 100명정도의 공동체는 직접적인 관계를 보장하며, 리더십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또한 관료주의 성향을 줄이고 보다 작은규모의 토지구매가 가능하다. 공동체들은 한 주기에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즉, 새로운 정착을 통한 대규모 토지취득 부채의상환, 토지·빌딩·기계의 확장과 작업의 확대, 그리고 제2세대 공동체 설립에 필요한 새로운 토지구입을 위한 저축 등이다. 이러한단계들은 어떤 공동체의 정착과정에서는 다른 공동체에 비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한 공동체가150명으로 늘어날 즈음에는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계획이 수년 전부터 이미 진행된다. 그 주기의 마지막 5년 동안은 혼합농장,곡식재배, 혹은 낙농목장 중 어느 하나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1,200에서 1,400 헥타르 정도의 토지구획을 구입하기 위한자본축적에 헌신하게 된다. 제1세대 공동체는 근처에 위치한 토지를 구입하고 약 60명에서 80명에게 필요한 건물들을 세우기시작한다. 새로운 작업을 위한 자금지원은 수년에 걸쳐서 변화되며, 부모 공동체의 재정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된다. 때때로 거액의1차 계약금이 현금으로 지급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공동체나 은행에 차입을 요청하기도 한다. 새로운 공동체가 충분히발전하면 제1세대 공동체는 2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지고 목회자와 부목회자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사를 준비한다. 어느 집단이 새로운공동체로 옮겨갈 것인지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남아있는 집단은 거의 두 배에 이르는 과거 공동체의 사용공간을 구성원들에게 맞도록재정비한다. 2개 집단으로 분리됨에 따라서 모든 지도력의 지위도 2배로 늘어나고, 젊은 남성들은 작업을 책임지는 기회가늘어난다. 또한 각 집단에게 수년 동안 계류되어 온 갈등을 해결하도록 허락한다. 한 집단이 어떤 목회자를 따르면, 남은 집단은다른 목회자를 자연스럽게 따라감으로써 고조되었던 긴장이 가라앉게 된다.
허터라이트 공동체들은 도시나 주요 도로로부터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고, 일반인과는 격리되어 토지로 둘러싸여 있다. 많은 관점에서 공동체들은 서로 유사하다. 가능한 한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는 핵심건물들은 주방, 교회, 주거건물, 유치원, 독일어와 영어 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공동체들은 복합건물 변두리에 영어교사를 위한 주거시설을 가지고 있다. 각종 농장건물들은 소음, 냄새, 농장차량으로부터격려시키고, 공동체 외부로부터 반입을 위한 접근도로를 제공해 주도록 주거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기계실, 저장창고, 차고, 농작물 작업을 위한 연료창고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축사, 물탱크, 먹이통, 소, 돼지, 양, 닭,오리, 거위를 위한 외양간은 함께 쓰도록 나눈다. 가장 초기의 공동체들은 오리와 거위들을 위해 연못이나 강을 소유하고 있었으며,공동체를 위한 묘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공동체는 대단히 수직적인 위계조직을 지니고 있다. 꼭대기에는 성직자가 있고,그 다음으로 전반적인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관리자가 있다. 그리고 독일어 교사, 농작물·소·돼지 및 닭과 같은 각종부서의 책임자 순위로 되어있다. 이러한 모든 직분은 남자가 차지한다. 여자들은 음식책임자를 제외하고는 위계조직에는 참여하지않는다. 때때로 여자가 정원관리를 책임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남자와 함께 일한다. 지도력은 공동체내에서 매우 중요하며, 직분은세례를 받은 성인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지도력 때문에 어떤 공동체들은 성장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성직자, 공동체 관리자,독일어 교사, 그리고 선출된 몇 명의 다른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동체의 모든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가끔 회의를개최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남자들이 리더들을 위해 투표하고 일반적인 사항들을 토의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구성원들은평등하다. 구성원들은 또한 연령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다. 연장자일수록 존중을 받으며 식당에서 윗자리를 배려한다. 나이가 많은남자들일수록 보다 책임이 큰 직분에 선출된다. 예배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치는 연령에 따르며 젊은이들이 앞쪽에 그리고 연장자들이뒤쪽에 앉는다. 허터라이트 사회는 연령, 성별, 그리고 직분에 따라서 조직되어 있다.
경제생활
초기에 재세례파들은 16세기말 장원사회로부터 발전하여 유럽을 특징지은 무역과 경제활동 특히 수공업의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허터라이트들은 특별히 도기와 직물의 제조에 종사하였다. 또한 그들이 모라비안에서 전성기에는뼈교정가, 조산원, 외과의, 약용식물 전문가 등으로 명성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동유럽으로 탈출한 후에는 대부분 농부가되었다. 1870년대 북미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은 이미 경험이 풍부한 농업전문가들이었다. 수공업은 대체로 공동생활에서 농업을보완해 주었다. 오늘날에도 공동체의 모든 여성들은 재봉틀을 소유하고 가족들의 의복을 대부분 직접 만든다.
캐나다사스캬춘에 위치한 허터라이트 공동체 설립에 관한 연구에서 건축자재, 시설 및 다른 재료의 판매에 의해 수백만 달러가 지역경제에투입되고 있음이 밝혀졌으며, 농사수확물, 딸기채집, 울타리작업, 그리고 건축활동 등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이웃간 상호작용의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허터라이트들은 주위의 마을에 달걀, 버터, 쇠고기, 돼지고기, 가금류고기 등 생산물을 소매로판매하며, 많은 공동체들이 입구에 농장생산물 판매를 위해 광고를 한다. 죤 라이언(John Ryan)은 한 주에 위치한 공동체에관한 포괄적인 경제연구에서, 마니토바 주의 8개 지역을 비교하여 허터라이트가 현지환경에 적응하는 변화를 연구하였다.허터라이트들은 넓은 토지소유 때문에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라이언의 연구에 따르면, 1968년에 토지소유는 1인당 14헥타르, 가정 당 100 헥타르였으나, 마니토바 주에서는 각각 47 헥타르와 202 헥타르이었다. 그들은 마니토바 주의 농부들이일반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최근 수년간 이 비율이 변해온 것처럼 보인다. 허터라이트의 주요곡물은 귀리, 밀, 그리고 보리 등이며, 보편적으로 가장 최신형 농기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농부들처럼 광범위하게 비료를사용한다. 라이언에 따르면, 1968년 허터라이트들은 마니토바 주 시장에 대한 돈육 판매량을 15%나 증가시켰다.
슈미터로이트 공동체의 회계법인으로 일하는 MNPC(Meyers Norris Penny & Company)가 마니토바 주내78개 공동체를 기초로 해서 기업의 경제활동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78개 모든 공동체가 곡물재배, 가금사육에 참여하고있고, 77개 공동체가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대부분의 곡물은 동물들을 사육하기 위해서 재배한다. 곡물재배는 트랙터, 컴바인,베는 기계, 경운기, 트럭과 같은 주요 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허터라이트들은 이 기계들을 다룰 수 있는 기술자와 정비소를공동체의 내부에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업무가 대규모이기 때문에 이러한 투자가 가능하다. 허터라이트 공동체 주위의 어떤 주민들은그들의 자동차나 트럭들을 공동체를 통해 고치기도 한다. 1991년도에 마니토바 주내 전체 허터라이트 기업의 약 8%가 육우산업,약 5%가 가금산업에 참여했다. 계란이 주요 기업생산품이며, 10개 공동체가 칠면조, 8개가 거위, 그리고 3개 공동체가 오리를사육했다.
허터라이트 공동체들은 대규모 형태로 혼합농장을 운영한다. 대부분 돼지, 소, 가금 등을 사육한다. 필요한대량의 사료를 생산하기 위해서 곡물을 제분하고, 가축들의 성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들을 혼합해서 계란의 생산을 증가시킨다.양돈과 양계는 모두 노동집약적이지만 사료주기, 계란등급별 구분작업, 제분, 사육장 청소, 비료 살포작업 및 가금도살 등은 대부분자동화되어 있다. 허터라이트들은 최신 영농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대학교의 농업관련 학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수가농업학술지를 구독한다. 근대화와 실험에 대한 열망으로 그들의 대규모 영농사업들이 높은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성공적인영농사업을 통해 공동체방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교육
허터라이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공식적인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16세기 공동체운동의 초창기에구성원들이 성경을 읽고 그들의 믿음을 설명할 필요에 따라서 대부분이 문맹상태였던 당시 사회에 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오늘날은 유치원, 독어 및 영어 학교, 그리고 주일학교가 훈련과정의 전부이다. 3-5세의 어린이들은 크레인슐(Klein-Schul)이나 유치원에 참석한다. 거주지 내부의 소규모 건물은 흔히 부엌과 근접해 있고 몇 개의 방을 가지고있으며 대부분 미끄럼틀과 모래상자를 비치해 놓고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운동장이 있다. 공동체 내부에 나이든 소수의 여성들이 이시설들을 감독하며, 일주일에 며칠씩 책임을 맡고 있다. 비교적 자유로운 어린 나이의 어린이들이 훈련과 순종이 요구되는 유치원에다니는 것은 주요한 변화의 요소이다. 그들은 아침식사 전 7시부터 7시 30분 경에 도착해서 오후 3시까지 머무른다. 학교에서는2번 식사를 하며 식사시간 전후에 기도를 암송한다. 유치원의 교육방침은 공동체에 따라 다르다. 레흐러로이트는 다소 엄격하지만,슈마이더로이트는 더 많은 융통성을 허락하고 있다. 시설들은 대부분 근대화되었지만, 활동이나 놀이기구들은 많은 차이가 있다.학교출석일은 일년에 8개월에서 12개월에 이른다.
대략 5세가 되면 아이들은 그로스슐(Gross-Schul)이나독일어 학교에 입학한다. 교육은 공동체가 선정한 결혼한 남자가 담당한다. 학교 보모는 교사의 부인이거나 다른 나이든 여자가보통이다. 최근의 공동체들은 독일어 학교를 위해 건물에 특별한 교실을 가지고 있지만, 어린이들은 일반적으로 영어학교를 전후해서때로는 토요일에 출석한다. 그들은 중세기 독일어 성경을 배우고, 쓰기를 연습하며, 기도와 성경이야기와 교리문답 그리고허터라이트의 역사를 암송한다. 주요한 목적은 그들에게 순종과 허터라이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교사는 보조자와 함께흔히 어른식당에 붙어있는 별도의 방에서 5세부터 14세 사이 어린이들의 모든 식사를 감독한다. 소년과 소녀는 따로 앉고 나이별로식탁에 정렬한다. 교사는 어린이들에게 식탁예절과 일반적인 행동거지를 가르치며 스스로 식사하도록 돕는다.
영어학교에서는 6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이들이 지역학교 위원회가 고용해서 봉급을 지급하는 자격증명서를 소지한 정규교사의 지도아래 해당주(州)에서 제정한 교과과정을 배운다. 일반적으로 공동체들은 교사와 가족들에게 소규모 주택을 마련해 주지만, 현재 대부분의교사들은 인근 도시에 살면서 학교로 통근하고 있다. 교사들은 자유롭게 생활하지만 텔레비젼, 라디오, 잡지 등을 통해 어린이들에게영향을 주지 않도록 한다. 공동체의 목회자는 지켜야할 도덕의 범주를 정하고 어린이들에 대한 학교의 영향을 감시한다. 어린이들은연중 매주일 오후에 개최되는 주일학교에 참석해 영어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계속한다. 독일어 선생이 가르치는주일학교에서는 노래하기, 외우기, 아침설교 등 가장 중요한 부분을 통합하여, 독일어 학교의 연장으로서 허터라이트 신앙의 요소들을반복해서 가르치는 과정이다.
어린이들의 사회화는 독일어 교사, 부모, 혹은 작업감독관 등 어른의 감독아래이루어진다. 유년시절은 열 다섯 생일에 끝나며, 청소년 허터라이트들은 어린이식당을 떠나 어른식당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은아직도 위계조직 중 가장 낮은 위치로서 어른의 권위로부터 먼 거리에 있다. 더욱이 세례를 받지 않은 젊은이는 공동체의 완전한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엄격한 공동체 훈련과정을 통해서 일반사회의 어린이들과는 다른 성격의 개발이 가능할 수 있는것이다. 쉬린과 에드워드 쉬루더맨이 1978년에 수행한 연구에서 허터라이트 방식에 의해 구성원들의 긍정적인 태도가 나이와 함께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허터라이트 어린이들은 북미 어린이들에 비해 더 침착하고, 민감하며, 소심한 것으로 나타났다.소년들은 지적인 일에 관심이 없고 자신감이 적은 반면에 소녀들은 사려가 깊고 내성적이었다. 그러한 사회화의 과정은 허터라이트의이상과 관련해서 분명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허터라이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많은시간과 노력을 경주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보통 15세의 초등학교 수준에서 마치게 된다. 농업에서 잘 활용하도록 산수를 읽고 쓰고이해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게 고려되지만,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다. 소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공동체에서 가르치기위해서 훈련받는 사람이외는 극소수만이 대학교에 입학한다. 독일어 학교는 어린이들이 성경을 읽고 허터라이트의 역사를 이해하도록교육하고 있지만, 영어 학교는 영어를 소개하고 주위사회에 대한 기본지식을 배우도록 한다. 그들은 라디오, 텔레비죤, 잡지,신문, 그리고 대부분의 책을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과 개념은 한정되어 있다. 허터라이트들은 실용적인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철학이나 그 개념에 대해서 의심스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