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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또는 브레인스톰

개강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이란 항상 가슴 두근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나 정말 원하던 것을 마침내 획득했을 때에는 그것에 대한 기대와 경외감에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다. 인간은 전해질이었던가? 벌써 7학기 째다. 대학 생활을 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나는 이미 칠순을 넘긴 호호 할머니일진대, 어느 호호 할머니가 봄바람에 싱숭생숭 진달래 꽃같은 사랑을 꿈 꿀까. 주책이다, 주책.

사실, 썩 좋지 않은 시작. 방학 때의 버릇대로 늦게 자 버린 터라 에누리 없이 7시에 칼같이 흘러나오는 꼬맹이들의 쎄쎄쎄 알람 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알람을 끄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먼저 깨어난 정신이 온 몸에 기상 신호를 보내는데, 눈꺼풀의 반항이 가장 거세다. 그래봐야 5분을 못 넘긴다. 잘 자고 잘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복인데, 시도 때도 없이 자고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건 뭘까. 히이잉 힝힝. 애꿎은 천장에다 짜증을 뱉으며 눈을 떴는데, 너무 어둡고 너무 춥다. 어리둥절 멍하게 애써 머리를 굴려보려는데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 똑똑똑. 비님 오신다. 그럴 리가 없어! 오늘처럼 신성한 날 비가 웬말이냐. 오늘은 치마를 입어야지. 머리 감기 귀찮아. 아침은 먹을까, 말까. 빨래는 언제 하지? 두서 없이 몰아치는 생각의 파도들.

두려웠다. 그래서 학교 가기 싫었다. 미술에 대해 배운다는 것, 사실 너무 두렵다. 졸업을 1년 앞두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역시 두렵다. 과연 끝낼 수 있을까. 내가 그네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는 망설임이라는 작은 임프의 끊임없는 속삭임을 애써 떨쳐내고 용기를 일깨우는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세상에 안되는게 어딨어. 내가 한다는데, 울엄마 울아빠도 안말리는 걸 누가 말려. 사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술렁술렁한 성격 탓에 죽을 만큼 열심히 할 만한 근성은 부족하지만, 선물인지 폭탄인지 분간이 안가는 특유의 무대뽀 성격이 일단 체인메일 정도의 방어력을 발휘해 주신다. 벽을 오를 수 없으면 까짓것 문을 뚫어버리면 되는거 아냐.

걱정을 많이 했던 1교시의 조형론과, 타과생은 들을 수 없다고 전화가 왔던 7교시 디자인론(연계전공이란 말이닷!) 수업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조금 안심했다. 일단은 실습이 없어서 안심했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제도라 또 안심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공 이수자보다 배경 지식이 택도 없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것인가. '여러분도 다들 알고 있는'으로 시작해서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 듣도보도 못한 사람 이름과 사건들 속에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다른 이에게 꿀리는 것은 용납 못하는 이상한 성격에, 공강 시간에 도서관에 달려가 과장 초큼 보태서 내 팔뚝보다 두꺼운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얼른 빌렸다. 생각해 보니, 중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겠다고, 미술 하겠다고 엄마 아빠한테 바락바락 대들면서도 미술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던가. 해외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름은 줄줄 꿰차고 있으면서, 정작 근간이 되는 예술가들의 이름은 몇 개나 알고 있던가. 올해 S/S 트렌드가 퓨처리즘과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은 알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왜 관심이 없었던가. 부끄러웠다.

봄비 치고는 너무 세차게 내리는 바람에, 88올림픽은 들어만 봤을 07학번들의 입학식이 밍숭맹숭해 졌다. 금쪽같은 내 새끼 대학교 간다고 모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학부모님들 정장이 젖어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에 아침 겸 먹는 친구의 스콘을 뺏들어먹는다. 4학년이구나. 다이빙 보드 위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의 심정이 이럴까.

대학원을 가려고 했다. 공부는 임상 쪽이 재미도 있고 성적도 잘 나오지만, 임상방을 갈 만한 성적도 안되는 것 같고, 아픈 사람을 보는 것도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광고방을 가려고 했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두렵다. 게다가 평사원이 되어 상사들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일 따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영문과나 가지 왜 인지도도 비전도 없는 심리학과에 갔냐는 식의 주위의 시선들. 말은 안해도 '공부깨나 안했구나'라고 비웃는 것, 눈꼴시려웠다. 또 그런 시선에 상처 받는 수선화같은 우리 엄마의 슬픈 눈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요즘 문득, 내가 대학원을 일종의 도피처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위풍당당 삔냥이 언제부터 사람들 시선에 신경 썼다고. 물론 계속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지만, 대학원 때문에 연계전공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오늘 미술학부 수업을 들으면서 두려움 속에서 조심스럽게 피어오르는 벅찬 그 느낌, 놓칠 수 없다.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인생은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순간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다. 카르페 디엠. 순간을 잡아라.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는 실패에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반면에 매 순간을 영원처럼 노력했던 이들은 실패조차 당당하고 찬란하다. 이름 값은 해야지.





....이 기분, 딱 한 학기만 가라ㅡ_ㅡ.




사족)안경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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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안에서........ㅡ_ㅡ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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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puremoa.net/blog BlogIcon puremoa 2007.03.03 01:10

    안경 잃어버리고 새로 싹 맞췄는데
    자켓 안주머니에서 나온 적도... -_-;

  • Favicon of http://software.tistory.com/ BlogIcon 별바람 2007.03.03 03:03

    어떤 길을 가시든, 어떤 일을 하시든..삔냥님에게 행운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두손모아 바라겠습니다. 하느님의 가호가 삔냥님에게 함께 하길..^^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3 08:48

      아이코>_<황송합니다요~ㅋ
      항상 좋은 말씀만 하시고 제 얼굴도 용서해 주시는 마음 넓은 별바람님^^

  • 무한검제 2007.03.03 07:01

    학기 처음부터 역동적이네요..
    고민이 있을때는 가슴이 시키는데로 하세요.ㅋ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3 08:49

      사실, 다른 사람들이랑 별 차이 없는 하루였는데요,
      혼자 생각도 많고 오버도 심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에요ㅋㅋ
      고민이라기보다는 결심 쪽에 가까웠어요ㅎ

  • Favicon of http://lovecon.innori.com BlogIcon 러브콘 2007.03.03 08:19

    화이링 !! 한학기의 시작을 깔끄미 ~'ㅁ'

  • Favicon of http://inmyroom.net BlogIcon 얼음쇠 2007.03.03 12:25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픈 시기지요
    잘 될겁니다. 힘내세요 ^^;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3 20:52

      사실, 대학원 좀 많이 가고 싶은데, 거기서 제가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선뜻 망설여집니다~

  • Favicon of http://foxer.tistory.com BlogIcon foxer 2007.03.03 13:52

    한학기..잘 보내시길 바래요.
    곰브리치 책은 너무 두꺼워서 선뜻 손이 안가던데 건투를 빌어요=_=/

  • Favicon of http://timehappy.net/tt/ BlogIcon Happy 2007.03.04 00:24

    삔냥님은 새학기가 시작된건가요? 'ㅁ'// 힘내세요 'ㅁ'//
    저는 고 3학년이라는... 학년에 시작이 ㅠㅠ..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4 00:56

      새 학기면서 새 학년이네요^^
      대학에 오니 학년 올라가는 게 별 비중이 없는 듯;;
      (하지만 4학년은 좀..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고3이면 제일 빡셀 시기군요^^
      고등학교 생활, 잘 마무리하세요^^

  • Favicon of http://vluu.tistory.com BlogIcon 산마루 2007.03.04 00:35

    항상 새로운 시작은 크나 작으나, 설렘이 있고
    희망이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화이팅!

  • Favicon of http://skygum.tistory.com BlogIcon 백마탄환자™ 2007.03.04 12:09

    -_- 치매 초기 증상이네요.
    삔냥님이 세탁기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심리학 굉장히 비전있어요.
    제 친구의 여자친구는 전산학과 나와서 대학원을 미술심리(?)로 갔는데
    지금 투 잡 하고 있습니다. -_-乃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4 16:31

      치매예방에는 고스톱과 바나나가 좋다던데;;;

      심리학은 참 활용도가 높은 학문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지요..
      울엄마도 '점쟁이과는 왜 가냐?'고 처음에 말하셨고,
      제가 심리학과라고 하면 주위에서 제일 많은 반응은
      '내 마음을 읽어보아라ㅡ_ㅡ'입니다;;

  • Favicon of http://unjena.com/ BlogIcon Hee 2007.03.04 13:08

    뭐..
    전 안경 쓰고 있으면서 안경 어디갔냐고 온 방을 뒤진 적도;;ㅅ;;;
    그나저나 개강이라니..축하!!!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4 16:32

      저도 그런 경험이...ㅋ

      개강이 과연 축하받을 일인지ㅡ_ㅡ아니면 고인의 명복을 빌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 Favicon of http://mykinoko.tistory.com BlogIcon 키노코군 2007.03.04 13:55

    흑.. 이제 개강 이군요. ㅠㅠ

    저도 호돌이 였는데............ (....)

    내년에는 꼭 개강에 낄 수 있겠죠? ㅠㅠ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4 16:33

      키노코군도 호돌이군요!!!ㅋ
      내년엔 반드시 낍니다!!!ㅎㅎ너무 걱정 마세요~
      제 후배 중에는 저보다 7살이나 많은 오빠도 있어요^^

  • Favicon of http://software.tistory.com BlogIcon 별바람 2007.03.04 19:05

    예쁘고 착하신 삔냥님을 알게되서 제가 더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ㅋ

  • Favicon of http://may.minicactus.com BlogIcon 작은인장 2007.03.05 07:46

    사족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길이 보인다 할 때 후딱.... 그 길을 잡으세요.
    대4학년때 안 잡으면 두고두고 고생이더군요. ^^;;

  • Favicon of http://ruhaus.com BlogIcon 루돌프 2007.03.05 15:55

    어... 어째서.. -_-
    안경이 세탁기 안에서...
    ㅎㄷㄷㄷ;;

  • Favicon of http://skygum.tistory.com BlogIcon 백마탄환자™ 2007.03.05 20:45

    행동심리를 공부하게 되면 실제로 몇가지 행동의 단서만으로도
    현재 사람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던데요?

    교양심리때 여성심리에 관한 내용 중에 배웠던 게 있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다 까먹었지만..
    그 때 배웠던 걸 몇 번 써먹으면서 '오~ 기막힌데?'라고 느꼈던 건 기억나요.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6 01:12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지만, 그건 꽤나 피상적인 수준이지요~^^
      요즘에는 그런 사람 만나면 그냥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뭔가를 알고 있다는 웃음을 지어줍니다ㅎㅎ

  • Favicon of http://software.tistory.com BlogIcon 별바람 2007.03.06 01:13

    근거가 없다니요!! 삔냥님은 예쁘고 착하십니다 제가 맞다고 하면 무조건 맞는거예요 아시겠죠? ^^ 특히나 삔냥님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는 사랑스러운 볼살이라고나 할까요? :)

  • Favicon of http://www.hansfamily.co.kr/sayme/jc BlogIcon 마래바 2007.03.06 19:47

    사족 때문에 댓글 달게 되는군요. ^^
    그나마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저희 집 세탁기는 간혹 그런 이물질 때문에 중간에 섭니다. 돈 달라고 하는 소리가.. 흑흑..

  • Favicon of http://software.tistory.com BlogIcon 별바람 2007.03.06 23:20

    ㅎㅎ 삔냥님의 사랑스러운 볼살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언제 삔냥님과 데이트할때 그 볼살의 매력에 빠져버릴지도~ㅋ

  • Favicon of http://software.tistory.com BlogIcon 별바람 2007.03.06 23:49

    그나저나 개강하셨을텐데,학교는 다닐만하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삔냥님이 별탈없이 무사히 학사모의 여인(?)이 되길 바랍니다^^

  • Favicon of http://johnjung.pe.kr/tt BlogIcon john 2007.03.07 00:24

    혼자가는 길이라는 게, 멋있기도 하지만 힘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곳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한 고통쯤이야,...
    부디 그 길이 선생님의 인생에 보다 한걸음 나아가는 선택이길 빌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merrysunshine.net BlogIcon ☆삔냥★ 2007.03.07 13:52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혼자는 이미 익숙해요^^
      근데...선생님이라 함은 ...저를 말씀?ㅋ
      왠지 생소한데요?
      아직 '나는 어린애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