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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또는 브레인스톰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생겼나?

나는 길을 지나다니다가 종교인들에게 무진장 잘 붙잡히는 편이다.

처음 한국 왔을 때는 100m 지나가면서 두 명한테 붙잡힌 적도 있다.

보통은 학교 안에서 붙잡히는데, 가장 많이 나를 잡는 말은

"이 학교 학생이세요?"


이며, 그 다음으로는

"옷을 참 특이하게 입으시네요."

ㅡ_ㅡ남이사;;;

길을 묻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만나는 편인걸 보면,

내 얼굴에는 나한테만 보이지 않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메모가 붙어있지 않나 싶기도;;;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의 요청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명동이나 신촌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내 손에만 전단지가 한가득;;;

다른 사람들은 버릴 걸 뭐하러 받냐고 묻지만,

그 사람들도 그걸 나눠주는 일이 끝나야 돈을 받고 집에 갈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들고,

또 내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같은걸 잘 못하기 때문도 있다.




어쨌든 오늘도 걸렸다.

이번엔 좀 제대로 걸렸다.

할리스에서 esperanza양과 커피 한 잔 하고 nnin군에게 달력을 받으러 가는 길에,

백기관 앞에서 왠 언니가 내 옆에 따라 붙었다.

ㅡ_ㅡ이어폰 꽂고 있을걸.....;;;;



"저...죄송한데요, 여기 학생이세요?"

죄송한건 아십니까?

"아..네."

"(아주 반가워하며)안녕하세요, 저도 이 학교 출신이에요. 02학번. 계절학기 들으시나봐요?"

"아닌데요."

"아...그럼 왜 학교에..?"

"이것저것 볼 일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나...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이렇게 나왔어요."

"아..네...관심 없거든요?(걸음을 빨리 하며)"

"(내 말은 들은 체 만 체 계속 따라 붙으며)몇학번이세요?"

"(정말 심각하게 관심 없다는 투로, 여전히 경보 수준의 걸음걸이를 유지하며)03이요."




등등의 정말 쓰잘데기 없는 신상 얘기를 하며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보통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면 갈 법도 한데, 꽤나 열심히 따라오더라.

내가 nnin오빠를 만나서 달력을 받을 때도,

정문의 횡당보도를 건널 때도,

옷 수선집에 가서 옷을 찾아 올 때도,

집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결국에는 집 앞까지 따라오더라.

.......믿음의 힘인거냐ㅡ_ㅡ;;;

나보고 잘 웃는단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거든요?ㅠㅠ

그냥 대충 대답하면 빠이빠이 하겠거니 하다가 내가 지쳤다;;

점점 대답을 시니컬하고 차갑고 간결하게 했음에도 계속 따라오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자신이 진리를 찾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왔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걸 전해주고 싶단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한번 알아 볼 기회를 가져 보란다.

복음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주는 거란다.

고린도서 몇장 몇 절에 나와 있는 말이라면서.




종교? 좋다.

그걸로 사람이 평온하고 행복해지며, 윤리의 기준이 되어 주며, 서로 돕고 사는 환경을 조성해주니까.

하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 하에 집까지 따라오는 건 조금 무례한 것 아니냐?

중간에 내가 "관심 없는데요"라는 말을 세 번은 한거 같은데....

물론 그 사람도 내가 안타까웠겠지.

사후세계도 안믿고, 성경을 읽고 별 감흥이 없었다고 하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해주고 싶었겠지.

그런데 그 "복음"은 풀어 말해서 "복된 소리"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서 최소한 기분은 좋아야 "복된 소리"아닌가?


게다가 그 언니...ㅡ_ㅡ사람을 꼬시려면 말발은 좀 세웁시다;;;

같이 걸어가는 내가 안쓰럽더라;;

그래서 사람 설득시킬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선교도 좋고, 복음도 좋은데,

다른 사람의 시간 잡아먹고, 집까지 따라붙으면서까지 설득하려고 하는건 좀 도가 지나쳤다고 본다.

특히나 나처럼 대한민국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뭐...그만 따라오라고 딱 잘라 말 못한 나도 참 자기주장이 약해서 탈이긴 한데,

그럼 안되지, 언니!!

장로교에 신도 많잖아?

그만해ㅡ_ㅡ